‘이·공·이·사’, 이들 네 사람은 1년간이나 함께 잘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옥황상제께서 ‘사’에게 말했다.
“사야, 이제 이·공·이와 헤어질 시간이구나.”
“왜요, 가기 싫은데요.”
“이제 너의 임무는 끝났다. 더 넓고 큰 우주 저곳으로 가렴.”
“지구에 더 있고 싶어요..”
“아니다. ‘오’가 오고 있다. 이제 그가 너의 일을 대신할 것이다.”
사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산은 그대로인데 강물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같은 곳을 흐를 수 없다는 것을.
벌써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달려오고 있는 오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고, 함께 잘 살았던 이공이는 점점 사로부터 서쪽으로 멀어지고 있다.
좌우를 둘러보니, 이공이는 멀어지고 오는 가까워지고 있다.
옛날 숫자가 없었을 때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시장에서 매우 불편하였다. 잦은 싸움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새끼줄이나 돌멩이, 점토판에 새기는 방식을 썼다. 뭔가 부족했다. 이러한 불분명한 셈법으로 인한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어느 날 사람들은 숫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삶은 명확해졌고 편리했다. 그 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0’이라는 개념도 만들어졌다. 영(0)이 과연 숫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철학적 관점에서.
시간이 먼저인지 숫자가 먼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먼저인 것 같다. 인간의 존재 유무에 관계 없이, 시간은 우주의 근본적인 측면이니까. 그럼 숫자는 뭐냐? 숫자는 시간 속의 현상을 정량화하고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인간의 창작물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듯도 하다. 우리가 시간을 잡아 두거나 미리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며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쇠약하여 죽는다. 이 과정을 우리의 관념에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처리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순간을 이해한다. 물리적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잠을 자도 시간은 가고 밥을 먹거나 축구를 해도 시간은 간다. ‘시간이 간다’라는 말은 시간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결국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숫자는 양과 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도 숫자를 사용하여 정량화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직선으로 배치해 버렸다. 아마 이런 점이 인류 스스로 시간을 이해하는데 더 어려운 관념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은 아인시타인이 대표적이다. 시간도 빵이나 커피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는 것이다. 시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중력이나 속도와 같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사(4)가 가고 오(5)가 오기까지 오늘로부터 13일 남았다. 337시간, 20,221분, 1,213,261초가 남았다.
2024년이 가고 2025년이 온다. 이들 두 해의 시간은 같다. 단순한 숫자에 매몰된 삶을 사는 아둔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극미한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관점으로는 결국 같은 시간이다.
1024년, 2024년 그리고 2025년, 3024년이라는 시간은, 모두 같다.
시간은 없는 듯하다가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떤 과거나 미래에도 있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시간이 神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한다면.
<김양배 프로필>
⦁ 언론인(칼럼니스트)
⦁ 지식재산권 전문가(특허·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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