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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 2024년 12월 17일 09: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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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와 부라노, 그리고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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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와 부라노, 그리고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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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돌이켜보면 작은 순간도 크게 느껴지곤 합니다. 특히 좋은 기억은 남고 나쁜 기억은 잊히는 경우가 많죠.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제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부풀려지곤 합니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공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합니다. 베네치아에서 맞이한 둘째 날에도 똑같은 공식을 적용할 수 있는데, 특별한 사건이 없는 그저 잔잔한 날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기억에 또렷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1. 베네치아의 아침

메스트레 역 앞에서 노란색 2번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의 로마 광장에 도착한 다음, 전날처럼 산타루치아 역까지 걸었다. 오늘의 첫번째 목적지인 무라노 섬으로 가기 위해 역 앞에 있는 Ferrovia 선착장에서 바포레토 DM(Diretto Murano) 선을 기다렸다. 활짝 펼친 바포레토의 노선도는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대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에 비하면 훨씬 미적이었다. 섬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색채의 순환을 따라가노라면 엉뚱한 노선에 몸을 실어도 언젠간 제자리에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얻으며 마음이 편안해 진다. 베네치아의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노란 표지판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듯이.

시간에 맞춰 도착한 바포레토는 십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베네치아 북단의 좁은 운하를 지나 섬의 외곽을 타고 돌았다. 거친 질감의 벽돌로 세워진 건물들이 섬 가장자리를 따라 줄지어 선 모습은 들쭉날쭉한 성벽 같았다. 이내 그 모습도 멀어지더니 우린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는 중이었다.

뱃머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조타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엔 이 배의 조타수이자 항해사이며 동시에 선장이라고 불러야 할 남자가 있었다. 그는 젊었고, 보잉 선글라스 아래론 일부러 꼼꼼히 면도하지 않은 턱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 바다만 응시했다. 그에겐 수 십 여개의 부표가 일렬로 늘어선 뱃길만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배가 무라노 섬의 선착장에 닿자 그는 진지한 얼굴을 벗어던졌다.

그는 굵은 밧줄을 나루의 말뚝에 감아 배를 고정시키더니 활짝 웃으며 승객들의 하선을 도왔다. 한 할머니가 그의 부축을 받아 무사히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선착장에 나와 있던 다른 직원은 원래 잘 알던 사이처럼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600여대의 수상버스를 소유하고 근 3,000명의 직원을 고용 중이며, 한 해 평균 1억 8천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는 이 거대한 대중교통 회사도 작은 섬의 선착장에선 한없이 친근해지는 셈이다.

2. 섬 전체를 산책해도 좋을, 무라노 섬

무라노 섬은 딱히 관광명소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조금 덜 화려한, 베네치아의 축소판이랄까. 거리는 한산했다. 유리 공예품으로 유명한 섬답게 중간 중간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있었지만 손님은 없고 라디오 소리만 빈자리를 메우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쓸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가하다고 해야 좋을 풍경이었다. 낡은 문들은 겨울 햇살에 몸을 덥히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세월에 낡고 단단해진 돌담은 어릴 때 지나쳤던 그곳인 마냥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아무 걱정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그러다가 때때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체감하기 위해 몇 미터의 순롓길을 걸어 광활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 누구나 그런 낭만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도 금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산책을 하며 정오를 넘기자 밝고 부드러운 햇살이 섬을 적셨다. 땅은 온기를 품었고, 수로는 거울처럼 빛났다. 우리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옷가지를 파는 간이 시장을 지났고,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노란 초등학교를 보았으며, 섬의 끝에서 바다와 조우하기도 했다. 쿠키향 가득한 베이커리에서 목을 축일 물 한 병을 사고 "그라찌에 밀레"라는 말 한 마디 덕분에 주인 아주머니께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작은 여자아이와 인사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한참 전에 지나갔던 조깅하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원래 유리 박물관을 볼 생각이었지만 뭐가 문제인지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고, 종국엔 찾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리는 좀 고달프더라도 마음은 한없이 느슨해지니 여행이란 바로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되는 것. 낯선 곳에서 낯익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고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 무라노 섬은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3. 동화같은 그곳, 부라노 섬

몇 년 전, 잡지에서 처음으로 부라노 섬을 찍은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나머지 오히려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멀고 먼 저편 어딘가에만 존재하는 곳처럼 느껴졌다(실제로 그랬지만). 평생 가볼 일 없는 딴 세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불과 몇 십 분 만에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동화 속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동화가 책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둘 중 뭔가가 벌어지긴 벌어진 모양이었다.

무라노의 건물들은 네모난 상자 위에 색을 곱게 먹인 명주를 덮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섬 곳곳에 걸린 빨랫감처럼 파란 하늘 아래 나부낄 것만 같았다. 이곳의 건물들은 회색 콘크리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 잊고 살았던 감수성을 이야기 했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좇는 마음에 고개를 젓고 채도가 높지만 장난끼 어린 색깔로 소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들이 벽에 칠하는 페인트의 가격이 얼마이고 그들이 손수 짠 레이스가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작은 땅덩어리 위에서 살아가는 방식엔, 그들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밤에 몸을 누이는 연두색, 파란색, 분홍색 주거공간엔 역사와 유머감각은 있을지언정 허영은 없었다. 겉멋들이기에 바쁜 우리의 도시가 한 번쯤 배웠음직한 미덕이었다.

물론 마냥 좋았다고만 할 순 없다. 그건 좋은 기억은 남기고 나쁜 기억은 지우는 시간의 법칙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일일 터이다. 우리가 갔을 때, 섬 전체엔 수로를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곳곳에 임시로 쳐진 철조망은 순수하게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 우리의 눈이나 카메라 렌즈의 욕구에 자꾸만 훼방을 놓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사진은 각도를 조정하면 마치 이 섬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뗄 수 있다는 것과, 눈은 감동의 힘을 받아 파헤쳐진 흙더미나 철 기둥조차 아름답게 보이도록 현실을 보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부라노를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상처에서 회복 중이라 해도 색동 건물 사이사이의 골목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빨래가 익어가는 길목에는 마른 천이 풍기는 기분 좋은 향기가 감돌았다. 문득 남의 집 안방마님이나 귀여운 아이들의 새 이불에 파묻혀 촉감을 느끼고 싶다는 무례한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사람은 지켜야 할 덕목이 있는 법이므로, 그 대신 평범한 가정집 골목의 오후를 한껏 들이마셨다. 옅은 세재 냄새엔 노스탤지어가 묻어 있었다. 초여름, 침대 위나 옷장 안에 새로 놓인 침구를 발견하고 그 위에 쓰러져 낮잠을 자는 상상이 펼쳐졌다. 집에 돌아온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어딜 가나 청록, 노랑, 연보라가 우리를 따라다녔다.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들도 만났다. 예쁜 색깔로 울 것처럼, 웅크리고 있었지만 한없이 태평해 보였다. 어느 골목엔 손에 잡힐 듯한 햇살이 내리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을 때 탄력 있게 부푼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질감이었다. 아름다운 건물을 제외하고 우리의 마음을 끄는 건 실상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도 동네 어귀나 도시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참으로 사소한 장면. 그래서 더 고마웠다. 며칠 후의 귀향이 아쉽기만 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서운했지만 부라노를 떠날 시간이었다. 햇살이 남아 있는 베네치아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착장으로 돌아가자 바포레토 시간표는 배가 오기 전까지 여유가 좀 있다고 일러주었다. 섬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4. 다시, 베네치아

본섬의 Fondamente Nove 선착장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자 해질녘의 베네치아와는 사뭇 다른, 오후의 라 세레니시마(La serenissima - 베네치아의 별칭)를 만날 수 있었다. 쓸쓸한 느낌은 그대로였지만 한결 가벼운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물속에 던져졌을 때와 직접 발을 담가 들어갔을 때의 차이와 비슷했다. 우리는 가끔씩 외로워지려고 노력한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카페나 도서관, 극장을 홀로 찾아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럴 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자신을 마주하고, 숨겨 두었던 생각이나 감정, 욕구를 솔직히 느끼게 된다. 비로소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된다. 가끔은 사회 속에서 상처 받은 영혼이 치유 받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원리가 오후의 라 세레니시마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산 마르코 광장으로 이어진 비좁은 골목엔 아침보다 훨씬 많아진 관광객들이 헤매고 있었다. 그와 그의 동행자 말고는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파티에 우리도 동참했다. 따스한 햇살이 적당히, 그러나 베네치아의 여행자들이라는 성긴 소속감은 가질 수 있을 만큼 모두를 분리해 놓았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자주 눈에 띄는 비둘기들도 그 빛에 파묻혀 있었다. 모든 게 느린 속도로 돌아가는 활동사진처럼 보였다.

오후 4시의 햇볕은 광장도 방문하고 있었다. 노을이 되어 어둠에 자리를 내주기 전에 한낮의 영광을 뽐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회랑엔 그늘이 져 있었지만 서쪽을 향해 선 산 마르코 대성당은 완전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빛은 화려한 장식과 기둥과 돔의 어지로운 총합에서 혼란스러움을 덜어냈다. 동서양의 건축 양식을 합친 역작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온전하게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광장과 성당에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시간을 보내다 무려 1.5유로에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고 리알토 다리로 걸어갔다. 내친 김에 산타루치아 역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바포레토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운하 위에서 베네치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는 사람들로 꽉차 혼잡했다. 가방을 조심하라는 픽토그램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머리 너머, 석양을 배경으로 노를 젓는 곤돌라 한 척을 보았다. 아름다운 유화를 앞에 두고 오랫동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베네치아를 단 한 순간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아마 그 장면을 고를 것이다. 승객이 너무 많아 카메라에 담을 순 없었다. 하지만 됐다.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 있으니 그걸로 됐다.

5. 작별

호텔에 맡겨두었던 짐을 찾고나자 어느새 밤이었다. 물가에서 밀려온 듯, 섬은 짙은 안개에 덮여있었다. 어찌나 자욱하던지 다리 건너편조차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이 순간, 좁은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사람들을 그려 보았다. 그들은 진정 섬과 섬 사이를 떠도는 조각배였다.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모험심과 두려움을 반반씩 품에 안고 바다를 건너는 항해사였다.

중간 중간 서있는 가로등은 그들에게 등대가 되리라. 내가 저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베네치아를 이제 떠나야 한다는 슬픔이 에둘러 치밀어 오르는 건지도 몰랐다. 캐리어를 질질 끌며 돌바닥을 걷자 바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나 혼자만 걷는 것처럼 여겨질 만큼 아주 크고 요란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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