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수해온 ‘돈 풀기’ 기조를 5년 만에 거둬들이기로 하면서 한국 경제도 당분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됐다. 양적완화의 축소는 미국 경제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큰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금융시장은 글로벌 자금흐름이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대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로로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정부는 미국의 이번 결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른 가계부채의 뇌관을 건드리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금융시장 불안 가능성에 대비해 긴급점검회의를 여는 등 비상대응체제에 들어갔다.
○ 빚 많은 가계·기업에 부담 가중될 듯일단 경제전문가들은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금융시장이 초토화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의 다른 신흥국들에 비하면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기초여건)이 훨씬 튼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450억 달러로 사상 최대 수준이고, 단기외채 비중도 27%로 1999년 이후 가장 낮다. 특히 경상수지가 21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벌이고 있는 만큼 향후 원화가치가 급등락할 여지도 적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도 19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우리 경제의 양호한 기초체력을 감안할 때 부정적인 영향의 정도는 제한적일 것”이라며 “한국은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양적완화 축소의 부정적 영향은 이보다는 안팎의 다른 경로를 통해 현실화될 개연성이 높다. 우선 한국의 주요 교역국인 신흥국들을 통해 위기가 전염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브라질 인도 등 경상수지 적자로 이미 대규모 자본유출이 발생하는 나라들이 직접적인 희생양이 된다면 글로벌 교역시장이 일시에 얼어붙으면서 당장 내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미국이 돈줄을 죄면서 엔화 약세를 부채질한다는 것도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기업들에 부담이다. 19일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04엔대까지 올라 2008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10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야말로 ‘발등의 불’이다. 미국의 본격적인 금리 인상에 대비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채권을 내다팔면 국내 시장금리도 덩달아 오르게 된다. 이 경우 변동금리 대출이 많은 한국 가계의 이자상환 부담이 커진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신흥국들이 이번 충격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국내 가계부채가 더 걱정”이라며 “미국의 출구전략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면 금리 인상 압박도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 산업계·증시 ‘우려 반, 기대 반’산업계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소식에 잔뜩 긴장하는 분위기다. 특히 경영난에 시달리는 한계기업이나 재무구조가 부실해 금융권의 집중관리를 받는 기업들은 금리 인상으로 자금 조달비용이 눈 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허찬국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는 “당국이 금융시장의 자본유출 속도를 늦추고 가계나 기업의 부채 관리에 힘써야 한다”며 “부실 대출이 늘어날 경우에 대비해 은행시스템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기업들은 양적완화의 축소가 ‘예고된 악재’인 만큼 충분히 대비를 해왔기 때문에 “당장 심각한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한다. 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결국 미국 경기가 살아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클 것 같다”며 “다만 신흥시장 쪽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수출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LG전자는 “회사 제품 중 해외 생산량이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환율 변동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증시에서도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를 일단은 신중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종우 아이엠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양적완화 축소는 예정됐던 것이고 그 속도도 완만할 것으로 예상돼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을 것”이라며 “화학, 조선 등 유망 업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기존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급격하게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오승훈 대신증권 연구위원은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에 나선 것은 경기가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경기가 회복되면 투자자금이 채권에서 주식으로 대거 이동하기 때문에 이를 대비해 주식 비중을 높이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