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은 예종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왕의 장인이 된다. 시집간 딸은 그해 아들을 낳았고 태자로 책봉됐다.
그런데 1122년, 태자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한 상태에서 예종이 승하했다. 그러자 이자겸은 예종의 형제들을 물리치고 태자를 왕좌에 앉혔다. 제17대 왕 인종이다.
이로써 이자겸은 어린 외손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왕보다 더 높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권력에 눈이 먼 이자겸은 이번에는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외손자인 인종에게 또 시집을 보낸다. 황당한 일이지만, 외손자 겸 사위인 인종을 등에 업고 마치 상왕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에 안 찾는지, 이자겸은 자신이 직접 왕이되고자 했다. 시중에 나도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 즉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을 독살하려 몇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위협을 느낀 인종이 즉위 4년인 1126년,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지만 이를 눈치챈 이자겸이 심복이자 사돈인 척준경과 난을 일으켜 오히려 왕궁이 불타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인종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은 신의가 없다며 이자겸과의 사이를 이간시켰고, 차라리 왕실을 위해 층성을 바칠 것을 권유한다. 이에 척준경은 인종의 말에 회유되어 스스로 반란 세력을 진압하게 된다.
척준경에게 배신당한 이자겸은 결국 반란에 실패하고 전남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
인종이 늙은 이자겸을 개경으로 부르자,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의 말린 조기를 둘둘 말아
다음과 같은 두 글자를 써서 함께 보냈다.
'굴비(屈非)'
비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즉 유배 온 신세지만 인종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영광 법성포의 말린 조기가 '굴비'가 된 연유이다. 그때부터 영광 법성포 조기가 '굴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과메기는 청어, 꽁치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린다고 해서 꿸 관(貫), 눈 목(目)의 '관목(貫目)"으로 부른 것이 관목이-과메기가 된 것이다.
이자겸은 인주 이씨였는데, 여기서 인주(仁州)는 인천의 옛 지명으로 인주 이씨들이 세거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5명의 태후와 5명의 왕후를 배출하면서 인주와 인주 이씨 가문의 위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조선 태종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등급이 높은 전국의 주(州) 일부를 산(山), 또는 천(川)으로 격하시켰는데, 그때 인주(仁州)도 인천(仁川)이 강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