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스포츠와는 달리 피겨는 기록으로 성적이 가려지는 종목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선수들이 매번 잘 할 수 없고 똑같은 기준으로 심사할 수 없죠. 이 부분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경기를 하면 괜찮을 것 같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어야 할 것 같아요."
'피겨 여왕' 김연아(24)가 지난 12일 올림픽이 열리는 러시아로 출국하기 전 남긴 말이다. 당초 이번 소치올림픽은 김연아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안겨주는 대회였다. 올림픽 2연패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에서 일어날 홈 텃세에 대비해야하는 점. 빙질을 비롯한 현지의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어느 종목이건 홈어드밴티지가 없는 스포츠는 없다. 러시아는 한 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피겨 강국'이었다. 남녀싱글에서 강세를 나타낸 것은 물론 페어 아이스댄싱에서도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리나 슬루츠카야(35, 러시아)가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후 여자싱글의 계보는 끊겼다. 러시아가 주춤한 사이 피겨의 변방국이었던 한국에서 최고의 스케이터가 등장했다. 김연아는 21세기 피겨 여자싱글의 각종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러시아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피겨 유망주 발굴에 들어갔다. 특히 여자싱글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기대주들이 대거 배출됐다. 수많은 어린 기대주들 중 러시아가 소치올림픽에 출전시킨 선수는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 러시아)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8, 러시아)였다.
김연아에 명백히 박했던 점수 지나치게 많은 점수 받은 소트니코바김연아는 20일 새벽(이하 한국시각)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동계올림픽 여자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기술점수(TES) 39.03점 예술점수(PCS) 35.89점을 합친 총점 74.92점을 받았다.
김연아는 4년 전 자신이 세운 쇼트프로그램 종전 역대 최고 점수인 78.50점(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골든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세운 올 시즌 최고 점수인 73.37점을 넘어섰다.
김연아가 연기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본 피겨의 전설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보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타라 리핀스키(32, 미국)는 "4년 전 밴쿠버 때보다 더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김연아의 우상인 미셸 콴(34, 미국)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숨이 멎을 듯하다(breathtaking)"며 김연아의 연기를 극찬했다.
영국 BBC 방송 중계진은 "김연아가 생각보다 점수를 덜 받은 것 같다. 스텝에서 레벨4를 받는 줄 알았다”며 의문점을 드러냈다. 이 경기를 중계한 프랑스 방송진은 “4년 전처럼 김연아의 연기는 소름이 돋는다. 완벽한 연기였다"며 칭찬했다.
전 세계의 언론들은 대부분 김연아의 연기가 흠잡을 곳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김연아는 7가지 기술요소에서 가산점(GOE)을 7.6점 밖에 받지 못했다. 그동안 김연아는 풍부한 가산점을 챙기며 경쟁자들을 큰 점수 차로 따돌렸다. 그러나 이번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에 오른 김연아와 2위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7, 러시아)의 점수 차는 불과 0.28점 차다. 소트니코바는 이번 소치올림픽 메달 후보로 꼽히지 않았다.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뒤 B급 대회인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우승을 제외하면 아직 국제대회 우승 경험이 없다.
소트니코바는 큰 실수 없이 자신의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7가지 요소의 가산점은 무려 8.66점이었다. 또한 기술점수에서도 39.09점을 받아 39.03점을 받은 김연아를 추월했다. 소트니코바의 기량을 생각할 때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였다.
가장 의아한 부분은 두 선수가 구사한 첫 점프의 가산점이다. 김연아는 차원이 다른 비거리를 지닌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점프를 깨끗하게 성공시켰다. 하지만 가산점은 1.50점에 불과했다. 반면 소트니코바는 트리플 토루프+트리플 토루프 점프를 성공시킨 뒤 김연아보다 높은 1.60점의 가산점을 챙겼다.
김연아와 소트니코바의 점프 퀄리티는 몇 번을 돌려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소트니코바에게 주어진 가산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정확한 점프를 인정하는 대회, 롱에지 언더로테 판정이 왜 존재하나채점 방식이 공정하려면 선수들의 구사하는 정확한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을 구분해야 한다. 교과서적이고 정확한 점프를 가려내기 위해 롱에지(잘못된 스케이트 날도 도약하는 점프) 판정을 내린다. 또한 점프의 회전 수가 부족하면 언더로테 판정을 적용한다.
하지만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는 좀처럼 롱에지나 언더로테를 잡아내지 않는다. 어지간히 뛰고 넘어지지만 않으면 인정해주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 러시아)는 명백히 잘못된 트리플 러츠를 뛰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리프니츠카야가 러시아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치른 대회의 프로토콜이다. 실제로 올 시즌 리프니츠카야는 심심찮게 트리플 러츠에서 롱에지 판정을 받았다. 개인 최고 점수인 209.72점을 받은 유럽선수권에서도 트리플 러츠는 롱에지 판정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국에서 열리는 소치올림픽에서는 리프니츠카야의 트리플 러츠가 '문제가 없는 점프'로 인정을 받고 있다. 단체전은 물론 플립에서 큰 실수를 범한 여자싱글에서도 그의 러츠 점츠는 롱에지 판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홈 어드밴티지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피겨 규정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적용된다면 큰 문제가 된다. 소치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은 부정확한 점프를 뛰어도 감점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점프의 퀄리티와는 상관없이 넘어지지만 않으면 기초점수는 물론 후한 가산점까지 챙기고 있다.
김연아의 2연패 여부를 떠나 일관성 없는 채점 기준은 올림픽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동안 숱한 적들과 상대해 이겨온 김연아에게 소치의 가장 큰 적은 일관성 없는 채점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