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乙未年)은 육십간지의 32 번째 해이다.
치욕과 오욕의 역사 뒤안길을 돌아 120년 전 오늘을 돌아보며,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의 현장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본다.
을미사변 [乙未事變]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우리국민과 위정자(爲政者)들은 잊어서도, 묵과해서는 더욱 안 되는 정치사와 민중봉기의 대표적 사건들이다.
청일전쟁 (淸日戰爭 1894,~1895)에서 일본의 승리로 인하여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치욕의 세월은 벗어났다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차마 글로서도 표현할 수 없이 난자(亂刺)한 일본의 만행은 인면수심의 악마의 향연장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다.
때는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으로, 일본의 만행을 생각하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분함과 치욕스런 수치심에 치를 떨어야만 하는 영겁의 세월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려만 온다.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한국 지배권의 야욕에 취약함을 직시하여 위생이 불결하다는 명분을 세워 을미개혁을 시도했으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조상들에게 내려진 단발령은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주요 개혁 내용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국 및 소학교 설치, 단발령, 서양식 의복 착용 등이었다. 이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앞선 양반이 주축이 되어 김도현, 이소응, 유인석 등 의병장과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몰아내려는 을미의병사건이 일어났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또한 그에 앞서, 동학혁명 당시 민중의 억울함과 아픔을 처절한 외침의 한으로 부른 민중동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보리’라는 후렴구로 “혁명이 갑오년(1894)에 성공해야지 을미년(1895), 병신년(1896)까지 가면 백성들이 낭패를 당한다”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기에 가슴에 한을 불러오건만 녹두장군은 을미년 3월 30일 새벽2시를 끝으로 영원 불귀의 객으로 사라졌다.
당시 일본,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이들은 미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일본은 침략적 전술로 접근하여 대한민국을 찬탈의 식민지화에 목표를 두고 야욕의 마수를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 1598년)부터 오늘날까지 포기하지 않음은 물론, 앞으로 더 악랄한 계략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중국 역시 다를 바 없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앞세워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 공식적인 견해로 확정해버린 것과 평양까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고, 상기시키고, 고취시켜 올바른 세계관을 알고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가 급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의 세력다툼의 중심이 되었고, 내분과 개혁의 외침은 아직까지도 몸부림 치고 있다.
을미년의 민중봉기가 3.1절 만세운동까지 이끌어낸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한 것 역시, 민중의 힘이었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깨달아야만 한다.